"바로 이것이 버지니아 그린 애플파이를 준비하는 방법입니다. 자, 이제 데이비드 카퍼필드 얘기를 해봅시다."
스택하우스 상원의원이 국회 연단에서 요리 레시피,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 카지노 규칙 등을 몇 시간째 읽고 있다. 백악관을 소재로 한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의 한 장면이다.
보건복지 관련 법안인데, 양당이 이미 합의했기 때문에 무리 없이 통과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새벽이 되도록 법안 통과를 보도해야 할 기자나 그 일을 주관하고 있는 백악관 참모진 아무도 퇴근하지 못한다. 스택하우스 의원이 단독으로 필리버스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는 옛 네덜란드어로 해적이나 약탈자를 뜻하는 "우라이 가이터(ury geiter)"에서 왔다는데, 이것이 영국에서는 "freebooter"가 되었고, 미국에서는 "filibuster"가 되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쓰이면서 점차 '악덕정치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어원처럼 필리버스터를 하는 스택하우스 의원은 이해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다 된 밥에 재나 뿌리는 이상한 늙은이 정도로 보인다.
드라마 속 백악관 대변인 CJ는 2000년 당시 미국의 필리버스터 규정을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연단에 있는 동안에는 발언권을 계속 행사해야 한다." 말을 멈출 수도 없고, 먹거나 마실 수도 없고, 앉거나 기댈 수도 없다. 그 찰나에 의장이 발언권을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택하우스 의원은 78세의 고령으로, 감기도 걸렸고, 아무리 애써도 어차피 통과될 예산이기 때문에 때문에 희망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밤을 새면서 목이 쉴 때까지 연설을 한다.
어쨌거나 드라마기 때문에 스택하우스가 엉뚱한 돌출행동을 하는 데에는 선한 이유가 있었다. 법안 중에서 한 부분의 예산 삭감에 반대했기 때문이 밝혀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택하우스를 도와주면서 그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 모습을 본 CJ는 이렇게 드라마를 맺는다. "If politics brings out the worst in people, then maybe people bring out the best in people."
150 에피소드가 넘는 대하 미드 <웨스트 윙>은 에미상을 싹쓸이한 명작이고,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명작이다. 그 중에서도 2시즌 17화 <Stackhouse Filibuster>는 전 시즌을 통틀어 가장 짜임새 있는 구성을 보여주고, 손에 꼽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진 / 연합뉴스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과 다르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필리버스터는 해당 법안과 관련된 내용만을 말해야 하고, 물도 마실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필리버스터가 소득 없이 끝나고 법안이 통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국회 내 폭력보다는 낫다. 필리버스터가 국회에 소화기를 뿌리는 것보다 낫고 최루탄을 터트리는 것보다는 낫다. 필리버스터는 격앙되면 안 된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몇 시간을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평소라면 아무도 관심이 없을 국회 연단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차분하게 이뤄진다.
그렇게 차분한 가운데 한 걸음씩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테러방지법 이후에 등장할 악법의 가능성이 하나둘씩 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 언젠가 악법으로서의 테러방지법은 무력화되고 개정되고 폐지되는 것이 아닐까. 정상적인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악덕 정치가'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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