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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리뷰

by Mr. 6 2018.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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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개봉했다. 예전에 <밀양>을 보았다가 작년에 다시 보고 나서 <시>를 보았다가, 끌린 듯이 <박하사탕>과 <오아시스>까지 보았다. 그리고 <초록물고기>까지 보았으니, 과작(寡作)하시는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한 번 정주행하기는 참 쉬운 일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창동 감독은 나의 왓챠 선호감독에서 당당히, 꽤 큰 점수 차이로 1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대충 600편의 영화를 보았고 그 중 나에게 5점을 받은 작품은 단 22편 뿐인데, 그 중 네 작품(<밀양>, <시>, <박하사탕>, <오아시스>)이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다.



그 중 가장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영화가 <오아시스>다. 연기력을 놓고 보자면 솔직히 <밀양>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문소리의 연기는 정신과 의사조차도 문소리가 실제로 뇌성마비 장애인인 줄 알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고, 이 당시 이창동 감독과 합을 맞추던 시절의 설경구의 연기는 얼굴부터 대사 처리까지 아, 정말 무결점 그 자체다.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어떤가. 극사실주의에 바탕을 두면서 판타지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사람의 가장 추한 면을 끄집어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면을 들여다본다. 다만 강간을 당할 뻔한 여자가 강간을 하려고 했던 남자를 사랑한다는 내용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점 때문에 <오아시스>의 별점은 가장 5점과 4.5점 사이를 수없이 왔다갔다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봉준호 감독은 불의 감독이고, 홍상수 감독은 술의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미지, 상징, 혹은 영화적 장치로서의 불과 술을 자주, 또 잘 사용한다. 이와 비슷하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가장 반복돼서 나오는 이미지는 "빛"이나 "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창동 감독을 "빛창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창동 감독을, 그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을 생각해 봤을 때, 물에 자주 비유한다. <초록물고기>에서 젖은 스카프로 얼굴을 덮는 장면과 물고기들, <박하사탕>에서는 철길을 따라 흐르던 강물, <밀양>에서 준이와 함께 얘기 나누는 곳, 또는 준이가 발견된 곳, <시>의 마지막 장면. <오아시스>에서도 물은 꽤 중요한 소재인데, 두려움과 분노로 실신해버린 공주를 깨우는 것이 바로 종두가 끼얹은 물이다. 글쎄. <버닝>에서는 어떘는지.



공주는 버려진다. 동시에 피붙이에게 이용당한다. 중증 장애가 있다. 친구가 없다. 그녀는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밖에 나갈 수 없으니 가끔 있는 "외출"에 차창에 뺨을 대고 올려다 볼 뿐이다. 종두는 그런 공주에게 마음이 간다. 종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식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윤리적 감성, 공감 능력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종두는 공주를 강간하려고 하다가 그녀가 실신하자 그녀에게 물을 끼얹어 깨우지만 정신을 차린 것은 오히려 종두였다. 종두는 공주를 옥상에 데려가고, 하늘을 바라보는 공주를 가만히 바라본다. 공주를 노래하게 하고, 밥을 함께 먹고, 빨래하고, 업어주고, 업은 채로 뛰고, 나뭇가지를 자른다. 사람들이 공주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볼 때, 그녀에게 가장 "윤리적"으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종두였다. 사람들은 떳떳해 보이지만, 그리고 흔히 종두와 공주를 동정하거나 흘겨보거나 내려다보지만, 그러나 동시에 가장 염치 없고 속물적이다.

종두는 나뭇가지를 자르고, 공주는 라디오 볼륨을 높이는 그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서조차 시끄럽다고, 잠 좀 자자고 소리를 지르는 아주머니가 있다. 종두와 공주의 사랑과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고통은 오롯이 그들의 몫이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 관심을 가진다 해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아시스"다. 세상은 전부 사막이고, 서로만이 오아시스다. 이창동 감독은 묻는다. 너희는 저들만큼 삭막하냐고. 너희는 저들만큼 오아시스가 될 수 있냐고.

왓챠에 남겼던 코멘트로 리뷰를 마친다.

"세상이 온통 사막이라서, 물은 피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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