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미드소마> 때도 느꼈지만 아리 에스터 감독에 대한 기본적인 감상은 첫 번째로 상징을 매우 잘 사용하는 감독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매우 변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 영화가 <보 이즈 어프레이드>다.
이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첫 번째로 이 매니악한 영화를 검색해서 리뷰를 찾아볼 정도라면 어느 정도 이 감독의 전작을 보았거나 이 감독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영화를 보고 와서 읽어도 늦지 않다. 두 번째로 그냥 어쩌다 이 영화를 알게 된 사람이라면 <유전>과 <미드소마>부터 본 후 취향에 맞으면 그 이후에나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감독이 숨겨둔 치밀하고 수많은 이스터에그들을 즐기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영화에는 강력한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얘기해두고 싶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고 난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은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보고 나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데, 아무래도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그보다 훨씬 전위적이고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영화이므로 그렇게 많은 리뷰도 없고, 그렇게 소통할 사람이 많지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먼지 쌓인 블로그를 꺼내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본다. 이 영화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사진 아래에 있을 것이고, 이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0. 서곡
보가 태어나는 장면이다. 태중에 있던 보는 엄마의 비명과 함께 태어난다. 보의 시야는 아직 온전하지는 않으나, 청각을 통해 엄마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엄마는 의사를 잔뜩 들볶는다. 엄마는 아이를 떨어트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떨어트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아이가 울지 않으니 당신이 아이를 죽였다고 소리를 지른다. 아이의 탯줄을 자르고 엉덩이를 때리자 (그리고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내 아들을 왜 때리느냐고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보의 엄마는 기본적으로 아들을 과잉 보호하는 성향인 것이다. 이 엄마의 아래서 자라며 보의 성격이 형성되는데, 이 간단하고 상징적인 시퀀스 만으로 감독은 차후의 전개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핍진성을 확보한다.
1. 물
물은 상당히 이중적인 소재다. 많은 문학 작품에서 물은 당연히도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지며,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여겨진다. 하지만 동시에 물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현전하는 한국 최초의 시가 <공무도하가>에서 강물은 "임"의 목숨을 빼앗는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은 폭풍 속에서 항해하다 빈사 상태에까지 이른다.
이러한 모티프는 보에게도 적용된다. 그런데 그 약은 엄마에게 매수된 정신과 의사가 준 약이다. 더군다나 전에 먹어 본 약도 아니고 신약이다. 이 약을 먹고 나서부터 보에게는 이상한 현상들이 자꾸 생긴다. 보의 일상에서 달라진 것은 약 뿐이기에, 이 신약이 모든 사건의 트리거인 것이다. 어쨌든 이 약을 먹으려면 물을 반드시 마셔야 한다. 이 물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고, 하술하겠지만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시체는 수영장에 떠있다. 엄마의 비보를 들은 후 욕조물은 넘친다. 휴식을 취하러 들어간 욕조에서는 뜻밖의 난투극이 벌어진다. 위에서 떨어지는 불쾌한 땀방울은 덤이다. 지브스는 수영장에 뛰어드는데, 이것은 광증의 표현이다. 그레이스가 준 한 잔의 물은 호의인 듯 보이나 알고 보니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가 쓰여져 있다. 토니는 페인트를 마시고 자살한다. 목욕을 거부한 반항적인 보는 다락에 갇힌다.
보가 목욕을 하는 장면은 맨 처음, 양수에 감싸져 있던 보를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말을 잘 듣던 유년 시절의 보는 엄마의 명령에 따라 목욕을 한다. 욕조에서 나온 보는 혼난다. 물에 가까워질 수록 엄마에게 순응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2-1. 1층 현관문
극중에서 보가 지키고 싶어 했던 문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보의 아파트 1층의 현관문, 그리고 보의 집 대문이다. 현관문은 거리의 수많은 부랑아와 폭력으로부터 보를 지키는 문이다. 온 몸에 문신을 두른, 또한 보에게 적대적인 부랑자를 피하기 위해 보는 전력질주하고, 간발의 차이로 문을 닫아 부랑자를 따돌린다. 바깥의 거리는 보가 느끼는 사회다.
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마냥 폭력적이기만은 한 것은 아니다. 보가 조각상을 구매한 노점상 근처에서의 폭력은 일탈 정도로 처리된다. 보의 집 앞 푸드트럭은 가장 일상적인 형태로 장사를 한다. 다만 그 사이사이에 폭력이 상당히 강조된 형태로 끼어들어있다. 물가에서 한가로이 노는 아이의 손을 엄마나 낚아채가고, 빌딩 위에는 떨어지고야 말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과 이를 방조하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의 집에 가까워질 수록 이러한 폭력성은 더욱 강해진다. 이것은 보가 기본적으로 슬럼가에 거주하기 때문일 것이나, 동시에 푸드트럭처럼 이러한 폭력 속에서도 평온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는 외부 사회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뉴스 등의 매스 미디어를 통해 접한다. 미디어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있는데, 뉴스를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이 사회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뉴스는 대개 좋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옆 동네에서는 불이 났고, 옆 도시에서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다른 지방에서는 조폭이 검거되었고, 세계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난다. 여기에 비하면 미담 사례는 손에 꼽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폭력을 정제하고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이 뉴스이며, 일견 뉴스만 보면 이 세상은 금방이라도 망할 것만 같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에서 평범하고 순하던 주인공이 흑화하는 계기가 무엇인가? 바로 거리에 만연한 폭력과 매스 미디어다.
이 영화에서도 뉴스를 통한 정보 취득은 보의 편집증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거리 풍경은 뉴스에 흔히 나오는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살인, 폭행, 마약 중독자, 시체 등은 미디어에서 자주 보이는 형태로 배치된다. 물론 미국 사회의 어딘가에는 이러한 것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바로 같은 거리에서 슈퍼마켓과 푸드트럭은 상당히 정상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면 이들은 <대부>에서처럼 마피아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혹은 이 상황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푸드트럭에서 음식을 사고 파는 장면은 일견 평화로워보이기까지 한다.
더군다나 보를 죽이겠다며 벌거벗은 살인귀가 칼을 들고 설칠 때, 바로 옆엔 경찰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경찰이 무능한 것도 아니다. 흉기로 위협(?)을 가하는 보에게 경찰은 바로 총을 꺼내고 심지어 발사까지 서슴지 않으며 거리의 치안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보가 집에서 쫓겨나 비계에서 잠을 청할 때도 경찰차가 연달아 지나간다. 그렇다면 이 거리는 치안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거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찰의 불과 수십 미터 근처에서 칼을 들고 방금 갓 살인을 저지른 벌거벗은 살인귀는 실존하는가? 실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보도 나체고 칼 든 살인귀도 나체다. 경찰의 반응으로 보아 보가 실제로 흉기를 들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다면 나아가 보의 상처는 자해로 생겼을 것이다.
다시 문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면, 1층 현관문은 외생적인 폭력에서부터 보를 지켜주는 1차적 방어선이다. 이 문이 열리고 거리에 존재하던 모든 형태의 폭력이 줄을 지어 보의 집으로 향한다. 동시에 보를 괴롭히던 외부의 모든 폭력이 깨끗해진다. 이것은 가장 노골적으로 환상임을 보여준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보의 내면으로 폭력이 이동하자 보는 본인의 내면을 감히 직시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날 보는 깨진 현관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2. 집 대문
폭력과 공포가 만연한 외부와 달리 집은 보가 편안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보의 내면은 보의 집과 같이 허름하지만 안온하다. 그리고 대문은 이러한 내면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어막이다. 의사가 새로이 처방한 약을 먹고 난 뒤, 보의 집에는 사람도 죽이는 독거미가 숨어든다.
그리고 그날 밤에 문 아래 있던 좁은 틈으로 보가 너무 시끄럽다는 쪽지가 날아든다. 하지만 쪽지를 받고 문을 열고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 행해지는 복수로 보아서 보낸 사람은 옆방 사람일 것인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의 타이밍이 맞지 않는다. 또한 옆 건물까지도 들릴 옆집의 소음 공해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것은 보가 가지고 있는 조현병의 증세일 것이며, "누군가 내 귀에 도청장치를 달았다"는 것과 비슷한 허무맹랑한 피해망상의 표현일 것이다.
엄마 집으로 가야 하는 날, 보는 늦잠을 잔다. 허겁지겁 짐을 싸서 나왔다가, 짐을 복도까지 가지고 나오니 잊은 것이 생각난다. 챙기러 다시 들어갔다 오니 복도에 둔 짐이 사라져 있다. 옆에서 청소하던 인부에게 물어보니 "넌 X 됐어."라는 위협적인 한 마디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문을 잠글 수 없어 무방비 상태가 된 보의 집. 영화상에서 이웃 주민 중 보와 척을 진 사람은 옆집 사람밖에 없으므로, 짐과 열쇠도 옆집 사람이 가져갔을 것이다. 보의 내면은 무방비로 노출된다. 보는 이제, 영화 제목처럼, 두려워진다.
그렇다면 보가 가지러 간 것이 무엇인고 하면 치실이다. 엄마 집으로 갈 수 없는 이유의 발단이 핸드폰도 아니고, 우산동 아니고 고작 치실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계속되며 밝혀지듯 엄마는 지역 사회에서 알아주는 기업을 꾸린 인물이며 상당히 부유하다. 그러나 보는 현재 엄마네 집에서 치실 하나 요청하기도 면구스러운 성격, 혹은 상황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무언가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은 엄마의 집에 가는 시간을 늦출 수 있는 좋은 핑계다. 사소하디 사소한 치실을 생각해낼 정도로, 보의 무의식은 엄마의 집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끊임 없이 떠올리는 중이다.
어쨌든 대문이 뚫리고 나서 보의 집은 수많은 부랑자들에게 점령된다. 이
2-3. 기타 문
이 밖에도 수많은 문이 있다. 보의 엘리베이터 문은 스파크가 튀고(이후의 전자발찌, 그리고 보트와 연결된다), 심각하게 삐그덕거린다. 사회(1층 현관문)에서의 영향이 보의 내면(집)에 닿으려면 이를 보의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다듬어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보는 이것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상태다.
로저와 그레이스의 집에서 도망칠 때도 굳이 유리문을 깨고 나온다. (이는 깨진 현관문의 형상과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리문을 깨고 나와서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점은 일견 상징적이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그간의 필모그래피에서 건축적인 구조를 상징으로 활용하고 영화의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문이라는 상징을 즐겨 사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3. 일레인
그렇다면 일레인은 누구인가? 일레인은 함부로 문을 여는 존재다. 처음은 "수영장에 시체가 있다"는 외침에 보가 호텔 문을 열어준다. 일레인이 엄마 손에 붙들려 떠나게 될 때 일레인은 보와 엄마가 함께 자고 있던 크루즈 선실을 열고 들어온다. (크루즈는 애당초 중도 하선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도 일레인은 집 문을 서슴없이 열고 들어온다. 보와 만나고 잠시 나갔다가, "들어가도 될까? 아니면 그냥 갈까?"라며 보의 집 문지방을 넘어도 되는지 물어보며 끊임없이 플러팅을 날린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다가도 엄마의 방문을 지나자마자 돌변해서 망자의 유품을 착용해보며 물욕을 보인다.
그렇다면 일레인은 실존하는가? 적어도 성인 일레인은 실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레인은 엄마에게 돈을 빌려준 인물이기도 하고, 엄마의 부하 직원이기도 하다. 엄마는 일레인을 모른다. 일레인은 기쁘고, 일레인은 동시에 슬프다. 이처럼 일레인은 보를 만나 횡설수설하는데, 이것은 일레인이라는 인물이 본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며, 나아가 보가 일레인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보의 엄마 방에 들어와서는 엄마의 귀금속을 함부로 뒤진다. 슬퍼하는 일레인, 기뻐하는 일레인, 탐욕스러운 일레인, 유년의 일레인, 어느 하나 제대로 매치되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일레인은 왜 보의 곁에 자꾸 나타나는가?
보와 일레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엄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보는 순응하고, 일레인은 싸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레인의 엄마는 많은 점에서 보의 엄마와 닮았다. 보의 엄마와 일레인의 엄마는 동일인이거나 동일시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주인공이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초반 시퀀스에서 물가에서 한가로이 노는 남자아이의 손을 낚아채는 엄마는 보와 엄마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일레인의 어머니는 일레인을 손목을 끌고 가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보에게서 떼어놓고, 꿈 속 엄마는 보를 같은 방식으로 다락에 밀어넣는다. 일레인은 보의 다른 인격, 혹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다른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 보의 성격은 엄마에 의해 온순하고 우유부단한 것만 남기고 거세된다.
일레인은 보의 아빠가 죽었던 것, 나아가 보가 원래 죽기로 세뇌받은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죽는다. 일레인이 죽고 나서 침대에서 떨어질 때는 마치 목각인형 같은 소리가 나고 또한 죽고 나서의 형상 역시 비현실적인데, 여기서 일레인의 존재가 환상임을 알 수 있다. "콘돔이 터졌다"며 보의 남성성(?)을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칭찬하는 것은 덤이다. 일레인이 죽고 나서 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보트가 뒤집어지며 죽는다. 당차고 발랄한 일레인은 이를테면 보가 태생적으로 지녔지만 끝내 지키지 못한 밝은 면일 것이며, 생에 대한 의지일 것이며, 물적 · 성적 · 인정 욕구의 상징일 것이다.
4. 보의 아빠
영화는 보가 아빠의 기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보는 아빠의 기일을 맞아 엄마에게 가려고 하지만, 아빠를 만나본 적도 없는 보에게 이것은 사회 통념상으로는 존재하겠지만 보 개인에게는 큰 가치가 부여되지 않는 기념일이며, 아울러 엄마와도 슬픔을 나누기 힘든, 이를테면 공허한 기념일이다.
보의 아버지는 다락에서 남근 형태의 괴물로 묘사된다. 남자 아이에게 남근기는 엄마에겐 애정과 의존감을 느끼고 아빠에게는 경쟁심을 느낌과 동시에 아빠의 모습을 보며 본인의 성 역할을 배워나가는 시기다. 보는 본인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따라서 엄마에 대한 의존성은 강하고, 남근으로 상징되는 남성성은 결여된 상태다. 보의 내면적 성장은 다분히 남근기에 고착화되어 있으며, 보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손으로 당당하게 결론을 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상태다.
그럼에도 보의 아버지는 보를 찾아오는 추적자와 한판 승부를 벌여 추적자를 죽인다. 추적자는 누구인가? 보가 엄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죄의식이다. 다락의 아빠는 보의 죄의식을 죽인다. 보의 죄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다락(무의식)에 숨어있는 남성성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보의 아빠도 커다란 부상을 입는다.
◎ 주관적으로 생각해 본 타임라인
1. 집에 있던 보
2. 아빠의 기일에 모종의 사정으로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없었음
3. 엄마의 사망 소식을 접함
4. 자해 및 방황하며 떠돌다가 고향으로 향함
5. 엄마가 쓰던 방에서 수음
6. 엄마를 만나고 진실을 알게 됨
7. 엄마를 살해하고 본인도 호수 한가운데서 물에 빠져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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