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정해둔 사람이 흔치는 않겠지만, 나는 자작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거기에는 대단치 않은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때 학교가 끝나고 조금 놀다가 집에 들어가다 보니 어쩌다 보니 옆 반 선생님과 하교를 하게 됐다. 그 선생님과는 단지 몇 마디만 해봤고 옆 반 아이들로부터 무서운 선생님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선생님도 별로 할 말은 없는 사이였지만, 역시 초등학교 선생님은 아이와의 대화를 리드할 줄 알았다. 그냥 집에 가면 뭐하냐, 컴퓨터는 많이 하냐 등의 시시한 얘기로 대화의 공백은 어떻게든 메워졌다.
그러다 좋아하는 나무가 있냐고 선생님이 물었다. 무슨 나무를 좋아했더라, 소나무였나. 잠깐의 고민 끝에 없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마침 아파트 단지 안에 심어져 있던 자작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하얀 나무가 자작나무인데 자작나무 숲이 달빛을 받으면 정말 예뻐. 그래서 선생님은 자작나무를 제일 좋아해."
그 때부터 자작나무를 유심히 보다 보니 좋아졌다. 특별히 멋진 나무는 아니다. 벚꽃처럼 꽃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소나무처럼 가지가 굽이굽이 자라지도 않는다. 그냥 하얀 놈들이 숲을 이뤄 곧게 뻗어 자란다. 그래서 자작나무 한 그루는 눈에 띌지언정 초라할지 몰라도, 숲을 이루면 장관이다. 자작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햇살이 하얀 가지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데, 약간 안개까지 끼면 소설 속에 있는 듯 환상적인 기분이다.
검색해보니 내 탄생목도 자작나무다. 활기차고 매력적이며 우아하고 친절하다. 꾸미지 않고 수수하며 오버하는 것을 싫어한다. 저속함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지향한다. 그다지 정열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상상력이 풍부하다. 야망은 그렇게 크지 않고 조용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즐긴다. 이 설명은 그대로 나잖아. 별거 아닌 공통점도 일단 마음에 박이현 애착이 된다.
평창에서 일하면서 자작나무 숲을 많이 본다. 평창을 대표하는 나무인지 자작나무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가게도 많다. 오늘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왜 내가 그 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인데, 그 찰나의 대화가 아직도 남아서 내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또한 느낀다. 요즘 무슨 일을 하든 예전 경험들이 튀어나와 일이 한결 수월하다. 학교, 군대, 아니면 예전 직장/알바 등, 편하건 힘들건 가리지 않고 해왔던 일의 경험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내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나이테 사이는 촘촘히 채워지고, 매일 있었던 일들이 내일의 나아갈 길이 될 것이다. 순간을 소중히 하고, 궂은 일을 피하지 않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았던 과거가 현재의 나를 이끌어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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