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과제, 프레젠테이션까지 겹쳐 시름시름 앓던 찰나, 이 모든 것이 금요일에 끝나고 이 주말을 놓치면 또 한참동안 여행을 못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갈 수 있지만 막상 시간내긴 귀찮은 벨기에를 가기로 했다.
서둘러 유럽의 국제버스인 플릭스버스를 예약하고 유랑에서 동행을 구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갈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구해졌다. 버스는 05:33분 출발. 잠시 쪽잠을 자고 버스를 타러 갔다.
배낭 하나 둘러멘 채 뚱하게 서있는 나.
플릭스버스를 처음 이용하는지라 버스가 안 오면 어쩌나, 여기가 정류장이 아니면 어쩌나 벌벌 떨었지만 버스는 제 시간에 잘 왔다. 플릭스버스 처음 이용하시는 분들은 앱 깔고 그냥 표 사시면 정류장이 어딘지까지 상세히 알려줍니다. 어쨌거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졸다보니 어느새 브뤼셀 도착. 예정대로 10:45분에 브뤼셀 북역에 도착했다.
와이파이가 없으면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동행과 그랑플라스에서 11시 20분에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브뤼셀 내 대중교통 전부를 7유로에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1일권을 사고 여유롭게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트램을 타고 가다보니 도착해야 할 시간인데 그랑플라스 코빼기도 안 보인다. (설명충을 자처하자면 원래 그랑플라스에 트램 선로가 있는게 아니고 건물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트램을 탄 상태에서 그랑플라스의 코빼기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도심 대신 숲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려야 할 정류장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구글맵을 확인해보니 트램을 반대 방향으로 타버렸다... 연락이 되지 않는 동행이기에 애간장이 탔다... 결국 11시 40분쯤 도착한 그랑플라스.
동행과 만나기로 한 자리에 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래... 이역만리에서 연락도 안 되는데 20분이나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시다가 다시 올 수도 있고 와이파이를 잡고 연락이 올 수 있으니 그랑플라스를 돌아보며 12시까지 있어보기로 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칭송했다는 그랑플라스(Grand Place). 사실 세련되고 이쁘긴 하지만 우와~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니다. 그냥 유럽스럽다~ 정도의 느낌. 파노라마가 잘못 되서 살짝 찌그러졌다. 미안, 그랑플라스.
그랑플라스 중심의 시청사에서 누군가 결혼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관광객들도 사진을 찍으며 축복해줬다. 뮌스터 갔을 때도 그렇고 유럽 사람들은 길바닥에서 결혼식을 참 많이 한다. 가까운 친지들과 들러리들만 참석하니 간소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결혼 문화를 생각하면 배울 점이 있는 듯.
다른 각도에서의 그랑플라스. 왼쪽은 시청사, 오른쪽은 브뤼셀 시립박물관이다.
12시가 다 되어가서 이제 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혹시..." 소리가 들렸다. 동행분도 다행히 길을 잘못 들어서 늦으신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11시 58분이었다. 아슬아슬보스...
그랑플라스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오줌싸개 동상이 있다. 별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출발 전날 다음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에서 벨기에 동상의 얘기를 봤던지라 보러가기로 했다.
벨기에 관광청에겐 미안하지만 작디 작다. 되바라진 꼬맹이 하나가 중인환시리에 소피를 내깔기고 있을 뿐...
이 꼬맹이를 보겠다고 참 많은 사람이 온다.
세계 정상들이 벨기에를 방문할 때마다 이 동상에게 옷을 선물하는 것이 전통이라서 이 녀석에게 천 벌이 넘는 옷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옷을 입고 있는 날도 있다고 하던데 오늘은 발가벗고 있었다. 오리지날 버전을 봐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 녀석이 뭐라고 기념품 샵에도 오줌싸개 동상이 즐비하다. 심지어 오줌줄기까지 표현해놓았다... 애써 고개를 돌린다.
굳이 시간이 없다면 이 녀석 하나 보자고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차피 브뤼셀을 여행하려면 이 녀석을 한 번은 마주쳐야 하는 이유는,
이 녀석 주변으로 와플거리가 있다. 기본 와플이 1유로부터 시작이고, 토핑을 추가할 때마다 1유로 정도를 추가한다. 나는 딸기와 생크림을 추가해서 3유로짜리 와플을 먹었다. 점심을 안 먹었는데도 저걸 먹고 나니 저녁 때까지 속이 든든했다. 돈을 아끼시려면 와플을 드시라.
와플을 먹고 나니 딱히 할 게 없다. 브뤼셀의 단점은 그랑플라스를 제외하면 딱히 볼게 없다는 것이다.
미술관에 가고 싶었지만 동행은 그런 취향이 아니시라... 하긴 나도 암스테르담에서처럼 딱히 보고 싶은 작품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끄덕끄덕하고 다른 곳에 가기로 했다. 여행책을 뒤지다보니 브뤼셀 왕궁이 있다. 거길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에 야생의 성당을 발견했다! 들어가보기로 한다.
성당의 이름은 성 미셸과 성 구둘라 대성당. 13세기에 짓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중세 사람들 근성이다? 우와아아앙?
이름이 복잡한 이유는, 원래 이 성당은 '성 미셸 대성당'이었는데 1047년에 성 구둘라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미셸과 구둘라 두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Just Go 베네룩스편 참고) 무교인지라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어쨌든 성당을 나와서 킵 고잉하다보니...
벨기에 왕궁에 도착했다. 가기 전에 브뤼셀 공원이 커다랗게 있는데 거기에서는 다들 포켓몬고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쪽이 궁전의 뒷편이라고 하는데 앞편인 줄 알고 음... 별로... 하다가 그냥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명색이 왕궁인데 백도어만 보고 평가하다니... 미안, 왕궁...
왕궁 근처에서 살짝 교외 지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오면 유럽의 각종 랜드마크들이 1/25 크기로 지어져 있는 미니 유럽이 있다.
15유로라는 입장료를 낼 때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브뤼셀 자체가 볼거리가 워낙 궁한지라 굶주렸던 나는 들어가자마자 깔깔거리면서 놀 수 있었다.
에펠탑도 있고,
개선문도 있고,
피사의 사탑도 있고,
귀엽기 짝이 없는 베를린 장벽도 있고, (조형물 앞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면 움직인다)
영국 국회의사당과 빅벤도 있다. 사실 에펠탑 사진 정도 보여주면 다들 파리 다녀온 줄 안다. 구라치다 손모가지 날아가기 딱 좋은 곳. 이외에도 전 유럽의 유명한 건물들을 배경으로 재밌는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으니, 한 번쯤 가보는 것도 좋다.
와플 먹은 것도 다 소화되어 이제 저녁을 먹으러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사실 브뤼셀은 오줌 싸는 소년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줌 누는 소녀상도 있는데, 암과 에이즈 퇴치 운동을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던 이유는 이 주변이 먹자골목이다. 밥집이 빼곡한 좁은 골목 사이로 호객하시는 분들이 나오시는데 다들 한국어를 꽤 하신다. 서양인 눈에는 다 아시안으로 보일텐데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착각도 않으시고 "안녕! 한국인?" "홍합! 홍합!" "여기로 오세요~" 등을 제법 유창한 발음을 구사하며 소매를 붙잡아서 실소를 짓게 한다. 사실 점심때 돌아다니다가 이 주변에 왔었는데, 그 때 맥주를 공짜로 주시겠다고 한 집에 들어간다.
해산물이 가득한 빠에야와
유러피안 홍합탕... 우리나라 홍합탕에서는 얼큰한 맛이 난다면 여긴 풍부한 버터맛이 난다.
청교도적인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에 있다가 프랑스 요리의 영향을 받은 벨기에 음식을 먹으니 좀 살맛이 난다...
하지만 이 쪽 먹자골목(Rue des Bouchers)을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는 것이, 손님 끌어모을 때는 "프리 드링크!" 이러면서 꼬시고 들어갈 때는 굉장히 나긋나긋하지만, (흥정해서 공짜 맥주 두 잔을 받았다) 계산할 때는 공공연히 팁을 요구하기도 했고 갑자기 불친절해지기도 했다. (벨기에에는 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빠에야가 랍스터 반마리가 들었다지만 40유로가 넘었고, 요리 두개 시켰는데 78.5유로가 나왔다.
바가지가 의심되지만 그냥 나오기로 한다. (실제로 아시안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음식을 시킬 때는 가격을 꼭 물어보고 시키자.) 예로부터 호객 하는 식당 중에 맛집 없는 법이다. 맛있는 집은 여기 말고도 많을테니 잘 골라보시길.
동행과 헤어지고 4성급 호텔 Silken Berlaymont Brussels Hotel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혼자 묵는데도 침대가 둘이다. 널찍널찍하고 책상도 있다. 바로 옆에 EU 본부인 La Berlaymont가 있기 때문인지 정갈하다. 욕조가 있는 만큼 짧은 목욕으로 피로를 씻고 다음날 일정인 브뤼허(Brugge)와 헨트(Gent)를 기대하며 잠들었다.
열차 시간을 맞추려면 아침 일찍 나와야 했기 때문에 EU 건물은 그저 슬쩍 보고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사진에서 다급함이 느껴진다.) 역에서 동행을 만나기로 했는데 동행이 늦게 일어나서 늦을 것 같으니 먼저 가고 운이 좋으면 만나자고 카톡이 왔다.
기다리면 좋겠지만 그러면 기차를 1시간 늦게 타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19시에 예약되어 있어 일정이 너무 빡빡해진다. 하루에 도시를 두 곳이나 돌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 브뤼셀 중앙역으로 향한다.
- 2편에 계속 -
세상에나. 여행한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서 그림일기 느낌으로 올린 글인데 다음과 티스토리 메인에 올랐습니다. 감사드리고 이 글을 보시는 모두가 행복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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