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대학교에서는 한 학기를 쿼터A, 쿼터B로 나눠서 각 쿼터마다 다른 수업을 듣는다. 교환학생을 와서 첫번째 쿼터가 끝났으므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팀플이 아직 안 끝나서 마음은 찜찜했지만 어차피 프리라이더를 자처했던 첫번째 쿼터... 이제 와서 만회할게 있겠는가! 하는 호연지기로 버스표를 예매했다.
첫 목적지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도시로 꼽곤 하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직통 버스도 없을 뿐더러 네덜란드에서 파리를 경유해서 스트라스부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자면 17시간 반이 걸리는 강행군. 독일 쯤에서 경유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해진 경유지는 뒤셀도르프. 가깝고도 멀지만 딱히 크게 볼거리는 없는 곳이라 '언제 가기는 가야 할텐데...'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곳이다.
07시 48분 아침 차를 타고 대충 2시간을 달려 10시 30분에 도착한 뒤셀도르프의 첫인상. 일본의 시내같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 도시에 일본 영사관도 있고 그 주변에 라멘집이나 일본 상점이 밀집해 있는 '일본인 거리'가 있을 정도로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뒤셀도르프의 중앙역. 특별한 것은 없다. 시내 구경을 조금 하려고 스트라스부르 가는 버스는 2시간 뒤에 오는 것을 예매했더랬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로 한다.
뒤셀도르프에 한 번 갔다온 플랫 친구의 조언에 따라 '라인 타워'를 가보기로 했다. 말 그대로 라인강변에 있는 높은 전망대라고 한다.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날씨는 꾸리꾸리하지만 일단 할 게 없으니 걸어가기로 했다.
뒤셀도르프의 주택가. 독일답게 아주 깔끔하고 단풍잎도 아름다워서 걷는 맛이 났다. 프랑스 혁명기에 나폴레옹에 의해 도시가 개조되어 '작은 파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건물들은 전통적인 맛은 비교적 없고 자로 잰듯 반듯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교통의 요지이다보니 독일의 다른 수많은 도시들 처럼 2차대전 당시 많은 부분 파괴되어 다시 지어진 것이 아닐까.
구글맵을 따라 가고 있는데 굴다리 밑에는 무섭게 생긴 형아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 바퀴 돌아서 다른 굴다리를 택했다. 남자라도 유럽을 혼자 다니면 무섭다.
유럽에는 토요일마다 이렇게 장이 서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많으니 한 번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규모는 작아서 금방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유럽은 어느 장을 가나 꽃집이 있고 장사도 잘 된다. 사람들이 로맨틱한 것일까. 다들 일주일마다 꽃병의 꽃을 교체하는 것일까. 이 수요와 공급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유럽에서 꽃은 거의 생활 필수품인 것 같다.
가는 길에 만난 성 안토니우스 성당(Sankt Antonius). 이번 여행은 유독 어느 성당을 가나 공사중이었다. 들어가보진 않았지만 파독 광부 분들의 장례식도 거행된 곳이라고 한다. 사실 이 도시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은 것이, 불세출의 예술가 백남준 선생님이 교수로 계시던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이 있고, 앞서 말했던 파독 광부, 간호사 분들과 그 2세들이 많이 살고 계시다고 한다.
걷고 또 걸으니 뭐가 보이긴 보인다. 전망대가 있는 상부는 그렇다 치고 하부는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굴뚝같이 생겼다. 약간 실용적인 독일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라인 타워를 향해 가면서 '저게 뭘 닮았는데...' 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귀이개를 닮았다. (건축가 양반 미안합니다...) 어쨌거나 탄탄하게 생긴 것이 마음에 들었다. 도쿄 스카이트리에 올라갔던 경험도 생각나서 약간 도키도키한 기분.
입구는 무슨 원자로 들어가는 것처럼 생겼다. 20세기 소년의 만국박람회장에 온 듯한 세기말적인 디자인...
들어가면 바로 있는 매표소가 있다. 거기서 표를 사서 뒤에 보이는 기계에 냅다 넣으면 된다. 가격은 9유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이렇게 라인강이 보인다. 지금 사진을 다시 보면서 느낀 건데 백사장이 있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사람들이 나와서 비치타월 깔고 썬탠을 하지 않을까.
라인강은 운하화되어 있으니 이렇게 커다란 선박도 지나간다. 이처럼 라인강은 독일의 내륙교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붕이 아름다운 저 건물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다. 뒤셀도르프는 이름도 긴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주도(州都)다. (주 내에서 제 1의 도시인 쾰른이 주도가 되지 않은 것은 뒤셀도르프가 2차대전 때 상대적으로 덜 박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라인강을 따라서 내항(內港)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리에는 여기는 어느 도시 쪽인지 표시가 되어 있다. 날씨는 별로 안 좋았고 안개도 끼어 있었기 때문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래도 흥미로운 척 하면서 보고 있는데... 전망대가 너무 작다. 딱히 세세히 보지 않고 돌면 5분도 안 되서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것 같다. 뭐 대단한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도쿄 스카이트리를 머리속에 그리고 왔던 나로서는... 약간 실망...
전망대 안에는 이렇게 간단한 바, 카페, 식당이 있다. 하지만 돈을 아껴야 하고 또 아침 댓바람부터 뭘 그다지 먹고싶진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내려가기로 한다.
똑같은 길을 30분 걸려서 또 걸어가긴 싫으니 돌아가는 길은 트램을 타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운 트램 정류장에 갔는데 읭? 매표소도 없고 자판기도 없고 표를 어디서 사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래서 손자와 놀고 계시던 할머님께 물어봤다. 그랬더니 할머님은 짧은 영어로 "음... 너... 탈 수 있어... 티켓... 음... 안 사도..."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살다 보니 유럽인들은 다 영어를 잘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할머님은 나보다 영어를 더 못하시는 것이다. "오... 영어 공부를 해야되는데 말야..." 라고 수줍게 말씀하시면서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셨다. 교환학생 주제에 영어를 못해서 늘 곤경에 빠지곤 하는 나로서는 동지를 만난 기분.
결론은 "안 사도 돼! 나랑 같이 타!" 라는 것. 유럽은 트램 표 검사를 거의 안 한다. 할머님은 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같이 타기로 한다.
할머니는 트램을 타고 가는 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나도 한국에서 온 친구가 있다. 세례명은 아그네스인데 한국 이름은... 뭐였더라... '부자'...? 였던 것 같다." "이 꼬맹이는 내 손자인데 3살이다. 귀엽지?" "뒤셀도르프는 패션으로 유명한 도시야. 여기가 제일 번화한 곳인데 저기 비싼 브랜드들 보이지?" 등등...
뒤셀도르프에 큰 기대도 없었고 달랑 두 시간 머물렀을 뿐인데 지금도 뒤셀도르프를 떠올리면 가슴이 따듯해진다. 처음 보는, 영어도 잘 못하시는 할머니의 따듯한 정 때문에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손자 녀석은 금발에 곱슬머리였고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정말 인형처럼 귀여웠다. 사진이라도 한 장 같이 찍자고 할 것을... 아쉽기만 하다.
관광지는 조상이 물려준 유적 등으로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 있겠지만, 결국 마음 속에 남는 관광지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마치 어떤 맛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초콜릿 상자처럼 예상치 못한 따듯한 기억 하나 간직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면 버스를 6시간 넘게 타야 하기 때문에 버거킹에 들린다. 특이하게 여기는 케찹 대신 프리트소스를 줬다. 하얀 마요네즈 같은 소스인데, 벨기에나 네덜란드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녀석이다. 백 마디 설명보다 중요한 것은 맛있다는 점이다. 저렇게 세트가 대충 9.19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12000원 정도 하겠다. 우리나라가 싼 건지... 유럽이 비싼 건지...
어쨌거나 게눈 감추듯 먹고 버스가 와서 스트라스부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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